아줌마, 쓸쓸함에 관한 보고서

아줌마는 그 말의 질량을 따질 때 어머니와는 감히 필적할 수 없으며, 어딘지 모르게 궁색하고 초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안하무인이고 염치도 없다. 또한 사회조사 따위에서 아줌마에 해당되는 인구학적 범주는 30대, 40대 ... 중년 여성으로 표기된다. 아줌마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집단이 아니면서도 독특하게 풍기는 그 무엇이 있다. 무엇보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아줌마는 무성(無性)적, 비성(非性)적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줌마의 행태를 섣불리 비난하기에 앞서 여성성(女性性)을 잃어갈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삶을 이해해야겠다.      


아줌마의 범주에 속하는 여성에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에는 아줌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줌마를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 것은 주부, 어머니, 중년여성, 부인... 등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름들이 적용되는 맥락과 쓰임새는 각기 다르다.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자 팔 걷어 부쳐 봉사하는 이들에게는 아줌마라는 타이틀보다는 인류애적 모성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더 돋보인다. 인간에 대한, 세상살이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확보하여 어떠한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어 가는 아줌마들 역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아줌마가 동네 북인가?

대중매체에 비춰지는 영상에 따르면, 사회에서 일어난 갖가지 부조리나 문제에 아줌마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아줌마는 적어도 불행한 사회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만큼 책임질 일도 많다. 이를테면 공익광고에서는 과소비(IMF를 야기한 원초적 원인으로서)가 아줌마들의 과분한 치장 욕구로 인해 불거진 것처럼 그려낸다. 또 뉴스시간에는 요즘 성행하는 전화방의 고객이 아줌마라는 사실에 광분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란한 성문화를 아줌마가 주도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는 거리 인터뷰도 있었다. 이럴 때 꾸짖는 역할은 흥미롭게도 좀더 할머니에 가까운 나이의 평범한 아줌마이거나 정숙한 이미지의 여자 탤런트가 도맡는다.
이 뿐이랴. 낯뜨거운 교육열 또한 아줌마들이 선두에서는 비리이다. 또 우리 사회 역군인 남편의 기를 인정사정 없이 마구 내리눌러 고개 숙인 남자로 만드는 기수 또한 아줌마들이다. 이런 아줌마들의 행태는 특히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주 메뉴로 등장하여 웃음거리가 된다. 아줌마의 이러한 이미지는 30대를 넘어선 아줌마 됨에 대해서, 나이 듦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게 하는 요인이다. 마치 엄격한 자기통제가 없다면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저 밑바닥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운명적인 특성에 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아줌마로 불리는 순간 자신을 경계하는 현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어느 누군들 '아줌마로 되어감', '이미 아줌마임' 이라는 정체성을 달가워하겠는가?

    
아줌마의 눈 높이에서 그들의 신발을 신자

. 여성은 남성의 눈 높이에서 보여지고 해석되었다. 아까 보았던 아줌마의 행태도 아줌마의 육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고 해독하는 다른 사람의 눈에 의한 것이다. 여성이 빠진 여성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막상 아줌마의 솔직한 고백을 대하기는 쉽지가 않다. 정작 아줌마는 자신의 속내 삶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냐는 체념 아니면 달관의 경지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나름대로의 삶을 직조하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행로를 이리저리 탐색하면서 감정이입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줌마의 삶이나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상의 패턴이란 것이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두드러지지 않다 보니 별다른 주목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의 신발을 신어보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절하 해 왔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칠게 보자면 아줌마는 가정을 이루고 가사노동을 전담하며 사는 주부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남편과 자식을 입히고 먹이고 잠재우는 역할에 여념이 없으므로 '퍼진' 모습이 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자신의 앞날은 적절히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할 남편, 아니면 장성하여 성공할 자식에 의해 담보된다. 가사노동이 경제적 재생산으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아직 광범위하게 사회적으로 그 의미를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였다. 한 가정의 안정과 평안은 그 집안의 아줌마가 눈물과 피땀을 흘리면서 희생하여 세워진 공든 탑이다. 한때 여성운동 진영에서 일방적으로 헌납해야만 하는 가정주부의 희생이 부당하며 이들에게도 사회경제적인 위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자, 아줌마들은 자신이 일생을 두고 해왔으며 또 해나갈 가정 내에서의 역할과 의미가 단도직입적으로 공격되고 매도된다고 받아들여 매서운 비난을 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던 적이 있다.
그만큼 아줌마는 자신의 역할을 묵묵하게 해내었으며 그만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였다. 가정에서의 주부역할에 충실하면서 사는 아줌마들이 뭔가를 이루고 있다는 심정으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과 포기로 사는 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이 두 심정을 복잡하게 얽어매면서 사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아줌마의 존재 이유

가령 아줌마는 가정 안에 안주하고만 있는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들은 적극적인 소비 주체로서 자리매김 되기도 한다(소비가 미덕이던 IMF시대 이전에 더욱 그러하였다). 또 시간을 잘 운용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또 의미 있는 여러 활동을 할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가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종교생활의 연장으로 사회봉사를 하거나 환경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아줌마들이 적지 않다. 또한 지하철 등에서 남성들의 험상궂은 행패에 일방적 피해를 당하는 젊은 여성들을 안쓰럽게 여겨 그들을 비난하거나 온화하게 타이르는 이는 깔끔한 차림의 회사원도 아니고 딱 벌어진 어깨의 젊은 청년도 아닌 바로 우리의 아줌마들이다.
그렇다. 자존심 있는 아줌마들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 더 이상 자신을 성적 존재로 보지 않는 세상이 서운하면서도 지나치게 남을 의식했던 피곤한 시절을 넉넉히 보상받지 못해도 좋은 것이다. 내놓고 자신의 삶을 항변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아줌마를 다시금 보아야 하는 이유는 아줌마에게 내재된 엄청난 잠재성을 인정하고 살려내어 다양한 계층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데 있다. 설령 고정된 일상에 변화를 주려고 우연찮게 손 댄 도박이나 캬바레 출입(습관성이나 고의성은 제외하자)이 들통난다 하더라도 좀더 유연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자발적으로 보이지만 자발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아줌마들이 꽉 막힌 삶에서 밖으로 나갈 비상구를 찾고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이해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아줌마라는 이름에 애정이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들을 향해 조준된 획일적이고 가치절하된 시선을 바꿀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점 역시 수용해야 한다. 아줌마들이 품은 삶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사회 곳곳에서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이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낼 차례다.

글 - 이경미
이화여대대학원 여성학 전공.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문제 연구소 책임연구원